[윤상길의 행복글방] ‘구해줘 영화인’, 절벽 앞에 선 독립·예술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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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길의 행복글방] ‘구해줘 영화인’, 절벽 앞에 선 독립·예술영화
  • 입력 : 2021. 07.16(금) 14:52
  • 윤상길 한국미디어콘텐츠협회 자문위원장
서울극장이 코로나19 장기화 등에 따른 경영난 악화로 문을 닫는다. 극장 내 서울 유일의 고전영화 민간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와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는 내년 초 이사를 준비한다. / 뉴시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어렵지 않은 기업과 종사자가 있을까. 피부로 느끼는 실제 상황도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병’은 더욱 깊어만 간다. 모두가 공황장애를 경험한다. 높은 ‘자존감’ 하나로 버텨온 ‘예술계’에서조차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표현은 여전히 점잖지만, 비명의 속내는 ‘살려줘’, ‘구해줘’이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가. 지난 3일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한국의 지위를 개발도상국(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변경했다. UNCTAD는 무역을 통한 개발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이다. 1964년 UNCTAD가 설립된 이래 회원국의 개도국 지위가 선진국으로 바뀐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 우리는 미국이나 영국처럼 선진국에서 사는 선진국민이다.

그뿐만 아니다. CNN은 7일 “한국 여권은 여행하기 가장 편리한 여권 세계 3위이다”고 보도했다. 한국 여권을 지니고 있으면 세계 191개국을 무비자나 입국비자로 여행할 수 있다. 비자 면제(무비자) 국가가 많을수록 국가 신임도는 높다. 유럽의 문화 강국들인 핀란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스페인, 오스트리아, 덴마크 등은 우리보다 여권 지수가 낮다.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이 그렇게 죽도록 ‘죽도’라고 우기며 ‘독도’가 자리한 바다를 ‘일본해’라고 고집하던 ‘동해’가 세계적 공인 기구들에 의해 드디어 7월부터 ‘동해’로 공식 인정받고 있다. 영국 정부의 여행안내 사이트(www.gov.uk)는 한국 지도에서 ‘일본해(Sea of Japan)’단독 표기를 삭제했으며, 세계 여행 사이트(worldtravels.com)에서도 ‘동해(East Sea)’로 표기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열강들과 견주는 강대국이다. 그러나 선진국 사이에선 진정한 강대국의 필수 요소로 ‘문화강국’을 꼽는다. 오래전 백범 김구 선생은 그의 일지에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우리나라가 높은 문화의 근원이, 목표가,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라고 적었다.

백범의 바람처럼 국가의 경제력은 다소 뒤처져도, 문화 경쟁력이 높은 국가의 국민은 선진국민으로 ‘자존감’을 높여갈 수 있다. 한국은 세계가 인정한 선진국이고, 여권 지수가 세계 최정상인 나라다. 그런데 이 나라의 문화예술인들이 ‘자존감’을 접은 채 ‘생존’을 호소한다. 그들은 ‘자기모순’에 빠져 ‘속 빈 강정’으로 살고 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예술인들은 “예술인들이 국가를 믿는 만큼만이라도 국가가 우리를 지원해줘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 예로 이들은 최근 미국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한국영화 바라보기’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 영화인들의 드높은 국가 충성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의 꿈의 무대 미국의 오스카 시상식에서 한국인들의 잇따른 쾌거는 ‘자랑스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안겨준다. / AP·뉴시스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제(오스카상)는 영화인들의 꿈의 무대이다. 이 영화제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수상에 이어 올해는 윤여정 배우가 중요한 연기상을 받아 한국 영화의 위상을 높였다. 방탄소년단(BTS)의 빌보드 석권과 오스카상 쾌거로 미국 내 한국 대중문화에 관한 관심은 거의 ‘존경’의 수준이다.

우리나라 예술인의 잇따른 쾌거는 국민 모두에게 ‘자랑스런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충분히 안겨준다. 이 자부심은 곧 애국심과 직결된다. 특히 할리우드에서 보여준 한국인 수상자들의 애국심은 세계인의 본보기가 되었다. 봉준호 감독은 “국가를 대표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건 아니지만, 이 상은 한국의 첫 번째 오스카상이다”고 애국심을 드러냈다.

윤여정 배우는 수상소감에서 “저는 한국 출신으로, 이름은 ‘윤여정’이다”고 밝힌 뒤 “미국인들이 한국인 연기자를 환대해주는 것 같다”며 ‘한국인’임을 분명히 했다. 이어 “스티븐 연, 정이삭, 한예리, 노엘 그리고 앨런까지 우리는 이제 가족이 됐다”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연대감마저 강조했다.

봉준호 감독, 윤여정 배우의 ‘내 나라 사랑’ 발언은, 혐한 발언에 역사 왜곡을 일삼는 중국과 일본 영화인들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번 오스카상에서 큰 성과를 거둔 ‘노마드랜드’의 중국계 미국인 클로이 자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중국은 사방에 거짓이 있는 곳”이라며 조국을 비하했으며, 중국은 그의 수상 소식을 전하지도 않았다.

지난해 아카데미에서 분장상을 받은 일본계 미국인 카즈 히로도 마찬가지다. 카즈 히로는 수상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 일본 기자의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이 수상에 도움이 됐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나는 일본을 떠나 미국인이 됐다. 꿈을 이루기 어려운 일본의 문화가 싫다”고 답했다.

이처럼 한국 영화인들의 나라 사랑은 각별하다. 이제 받은 사랑만큼 국가도 응답할 때이다. 수도권의 4단계 사회적 거리를 비롯한 규제로 영화계가 받는 피해는 그 어떤 예술계보다 크다. 산업으로서의 영화는 물론, 그 기초를 이루는 예술영화계의 피해는 수치로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하다. 독립, 예술영화 신작들은 아예 관객을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중시설인 영화관 대부분이 개점휴업 상태다. 우리나라 영화관은 여러 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된 복합상영관 형태로 운영된다. 이들 복합상영관은 CJ, 롯데 같은 대기업에서 운영하거나 그들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 극장이라고 다르지 않다. 대기업은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한다. ‘돈 안 되는 사업’은 정리하거나 업종을 바꾼다.

부산일보·국민일보 기자, 시사저널 기획위원, TV리포트·티브데일리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방송통신위원회 소관 한국미디어콘텐츠협회 자문위원장으로 있다. ‘장군의 딸들’, ‘질투’, ‘청개구리 합창’, ‘충무로 25시’ 등 소설과 시나리오 희곡 평론집 등을 집필했다.
상업영화조차 제작이 미뤄지거나 개봉이 늦어지고 있다.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가 없다. 국내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악화하면서 관객의 감소 추세가 뚜렷해졌다. 이에 영화관측은 “아예 휴관하거나 폐관하는 쪽이 낫다”는 입장이다. 상업영화가 이럴진대 상대적으로 관객층이 엷은 독립·예술영화에게 스크린을 내줄 영화관은 없다.

복합상영관에 의무적(?)으로 배치된 예술영화관 모두가 휴관 상태이다. 서울의 경우 예술영화전용 극장으로 코로나19의 엄중함 속에서도 쉼 없이 예술영화를 상영해온 서울아트시네마도 폐관 수순을 밟고 있다. 관객을 만나지 못하는 예술영화는 더 이상 제작 동력이 상실했고, 여기에 종사하는 영화인 모두가 실직자가 됐다.

산업으로 발전시켜온 상업영화이지만 그 기본은 예술로서의 영화이다. 예술영화의 출현이 막히면, 결국 상업영화를 포함한 영화의 생산과 영화인도 끝내 사멸한다. 세계 속의 한국영화도 역사 속 한 페이지로 남을 뿐이다. 예술영화를 외면하는 영화산업계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이제 예술영화의 호흡을 이어줄 심장박동기는 정부 당국이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고 강대국이라면, 그 전제는 ‘문화강국’이어야 한다. 한국 영화인들의 ‘애국심’을 국가가 확인했다면, 이제 영화인을 포함한 예술인의 삶을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 본지에 실린 칼럼은 집필자의 개인적 의견으로, 뉴스코프의 공식적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윤상길 한국미디어콘텐츠협회 자문위원장